외로움, 소외, 불안…화려하지만 초라해지는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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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외로움, 소외, 불안…화려하지만 초라해지는 ‘무대’ 고독한 도시인의 그림과 영화…에드워드 호퍼와 ‘셜리’㊦

기사입력2021-12-25 10:00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에드워드 호퍼와 ‘셜리’㊦]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그림 속 인물들은 무심한 시선과 무표정한 얼굴, 딱딱하게 멈춘 몸짓으로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도시 공간에 놓여있다. 이러한 그의 그림에 현대인들이 공감하는 것은 우리가 도시를 살아가면서 그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명암대비와 보색대비의 강렬함과 화면에서 풍기는 외로움, 소외, 불안감은 호퍼의 그림에서 우리의 시선을 뗄 수 없게 한다.

◇스크린에 되살아난 에드워드 호퍼=도시인의 고독과 상실이 묻어 있는 호퍼의 그림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앤드루 와이어스(Andrew Wyeth), 에릭 슬(Eric Fischl), 알렉스 카츠(Alex Katz) 등 많은 화가뿐만 아니라,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등의 영화감독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급기야 호퍼의 그림을 그대로 옮긴 영화도 제작됐다.

오스트리아 감독 구스타프 도이치(Gustav Deutsch, 1952~)는 호퍼의 그림 13점을 소재로 1930~1960년대의 미국 사회와 여성의 삶을 보여준 ‘셜리에 관한 모든 것(Shirley:Vision of Reality, 2013)’을 선보였다.

이 실험적인 영화는 호퍼의 그림에 맞춰 13개의 막으로 나눠진 연극 같은 느낌을 준다. 영화는 셜리라는 여인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그보다 호퍼의 그림을 그대로 장면으로 재현하면서, 그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의 미국의 역사적 사건들을 상기시키는 것에 더 중점을 둔다. 1930~1960년대까지 약 30년간의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 즉 경제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50년대 매카시즘 광풍, 60년대 인종문제, 인권문제,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연대기적으로 영화의 주제로 등장해 호퍼의 그림에 새로운 이야기를 불어넣는다.

에드워드 호퍼, ‘뉴욕의 방’, 1932, 캔버스 위에 유채.<출처=le-polyedre.com>

영화는 호퍼의 ‘좌석 열차(Chair Car, 1965)’를 그대로 재현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한번 이 장면이 나오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시작 장면은 차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와 주인공 셜리를 바라보는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의 시선, 좌석의 형태, 기차 공간의 구조 등 호퍼의 그림이 정교하게 재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이 1965년 그려진 것을 생각한다면 이 장면은 영화에서 연대기적으로 가장 나중에 나와야 할 장면이다. 그런데도 가장 먼저 보여줌으로써 이후에 펼쳐질 내용이 주인공 셜리의 회상임을 감상자에게 알려준다.

이 영화에서 호퍼의 13점의 그림은 무척 정교하게 재현되는데, 그중 ‘뉴욕의 방(Room in New York)’은 영상과 그림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물의 위치와 색감, 분위기가 일치한다. 1932년 그려진 ‘뉴욕의 방’은 경제대공황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깊어가는 뉴욕의 밤에 부부나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남자는 신문을 읽고 있고, 여인은 피아노에 비스듬히 앉아 건반을 튕긴다.

남자가 앉은 빨간 의자와 여인의 붉은 원피스가 시각적으로 두 사람을 연결하지만, 서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모습 속에서 단절, 고독, 소외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영화의 내용에서는 셜리가 애인인 스티브를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의 한 장면.

이외에도 ‘저녁의 사무실(Office at Night, 1940)’, ‘브라운스톤 위의 햇빛(Sunlight coin Brownstones, 1956)’, ‘웨스턴 모텔(Western Motel, 1957’ 등도 영화에서 원작의 구도나 색감, 분위기가 완전히 똑같이 재현된다. 특히 마지막 ‘좌석 열차’ 장면의 바로 앞에 등장하는 ‘빈방의 빛(Sun in an Empty Room, 1963)’을 재현한 장면은 인물이 사라진 빈방을 보여줌으로써 이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인지, 그림인지 헷갈릴 정도로 신비롭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도이치 감독은 호퍼의 그림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호퍼가 있는 그대로를 단순히 그림으로 옮기는 게 아니라, 삶의 한 순간을 마치 무대 위에 구현한 듯 보여 그것에 끌렸다고 말했다. 호퍼의 그림에는 도시인의 소외와 고독이 스며있다. 이것은 우리 삶의 한 단편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호퍼의 그림은 우리를 자꾸만 끌어당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