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 그림을 봤어”…‘플란다스의 개’ 네로의 소원

프린트

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나, 그 그림을 봤어”…‘플란다스의 개’ 네로의 소원 죽기 전 마지막 속삭임…피터 폴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짐’

기사입력2022-03-23 10:40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어린아이들이 커다란 개만 보면 “파트라슈다!”라고 외치던 시대가 있었다. ‘파트라슈’라는 큰 개가 등장하는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때다. 1975년 일본에서 처음 방영된 후, 우리나라에 수입돼 1976년에 TBC에서, 1981~1982년에 KBS 1TV에서 방영된 TV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는 198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인기가 높았지만, 이 만화영화는 결코 희망찬 내용이 아니었다. 주인공인 ‘네로’가 대성당에서 추위에 얼어 죽는 것으로 이 이야기가 끝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죽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고 있는 장엄한 그림이었다.

네로는 곁에 있는 큰 개 파트라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그 그림을 봤어. 이제 소원을 이룬 거야. 지금 정말 행복해.” 그가 죽기 전에 했던 마지막 속삭임이었다. 마지막 회에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 만화영화에서 주인공의 소원은 성당에 있는 명화 한 점을 보는 것이었다. 그 명화는 바로크 시대 회화의 거장 피터 폴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짐’이었다.

◇착한 소년, 큰 개, 그리고 소원=요즘은 만화영화라는 말보다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한다. 만화영화라는 말이 세대를 가르는 기준이 된 듯하다. 만화영화라는 말에 익숙한 세대는 추억으로 간직한 인상적인 작품들이 있다. 나에게는 요술공주 밍키, 미래소년 코난, 로보트 태권브이, 은하철도 999, 개구리 왕눈이 등이다. 그리고 그 목록에 플란다스의 개도 포함된다. 플란다스의 개는 화가를 꿈꾸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나에겐 조금 각별했다. 하지만 마지막 회에서 주인공의 죽음은 어린아이의 동심을 파괴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플란다스의 개(The Dog of Flanders, フランダースの犬)는 필명이 위다(Ouida)인 영국 소설가가 1872년 쓴 아동문학을 쿠로다 요시오(黒田昌郎) 감독이 만화로 제작해 1975년에 방영한 일본의 TV 애니메이션이다. 1997년에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52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TV 애니메이션은 1975년 처음 방영될 당시 마지막 회 시청률이 무려 30%나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의 무대가 되는 벨기에에서는 이 원작 아동소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네 마리의 개와 함께 살며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물 이야기를 많이 썼던 위다(본명은 마리 루이즈 드 라 라메이)가 1908년에 죽자, 그즈음에 이 소식을 기사로 접한 일본의 외교관이 그의 삶에 감명을 받아 그의 대표작인 플란다스의 개를 일본어로 번역해 소개했고,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됐다. 그 인기에 힘입어 TV 애니메이션과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벨기에에서는 원작 아동소설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장면 중. 네로는 마지막에 루벤스의 작품을 보고 그 앞에서 쓰러진다.

플란다스의 개는 벨기에의 플란다스(Vlaanderen, 플란데런) 지방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 소년 네로와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개 파트라슈가 겪게 되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외할아버지 예한 다스와 단둘이 우유배달로 생계를 잇는 네로는 사납고 파렴치한 이동 철물상에게 혹사당한 후 버려진 파트라슈를 정성스럽게 치료해준다. 건강을 되찾은 파트라슈는 네로와 친구가 된다.

그림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던 네로는 파트라슈와 함께 매일 우유 수레를 끌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지만, 그런데도 열심히 살아가며 화가의 꿈을 키운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로아와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어 좋은 추억을 쌓아가지만, 마을의 대지주인 아로아의 아버지는 아로아와 네로가 친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만나지 못하게 한다.

어릴 적 엄마와 앤트워프(Antwerp) 대성당의 루벤스 그림을 보던 추억을 떠올리며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가던 네로는 소박하지만 따뜻함이 스며 있는 그림을 그려 미술대회에 출품한다. 입상하면 매년 200프랑을 받으면서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는 이 미술대회는 네로에게 화가가 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편찮으시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자신은 풍차에 불 지른 범인으로 몰리고, 공정하지 못한 심사로 미술대회에서 낙선하는 등 네로에게 남아 있던 희망의 불씨는 점점 꺼져간다.

모든 것을 잃은 네로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앤트워프 대성당. 엄마와 추억이 있는 곳. 보고 싶은 그림이 있는 곳. 하지만 은화 2닢의 성금을 내야만 커튼 뒤에 가려진 그림을 볼 수 있던 곳. 네로는 돈이 없어 못 봤던 그 그림을 성탄절 이브에 찾아간 성당 안 달빛 아래에서 보게 된다. 파트라슈는 그림 앞에 쓰러져 있는 네로를 찾아오고, 네로와 파트라슈는 그렇게 추운 겨울날 싸늘한 성당 안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낸다.

◇명화와 아우라(aura)=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림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십자가에서 내려짐(Descent from the cross, 1612~1614)’이다.

이 작품은 원숙기에 들어선 루벤스의 면모가 드러나는 작품으로 죽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이 담겨 있다. 예수를 포함해 9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십자가 위에서 조심스럽게 예수를 잡고 있는 예수의 제자와 십자가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죽은 예수, 그리고 붉은 옷을 입은 요한과 예수를 향해 팔을 뻗고 있는 세 여인이 역동적인 구도를 형성하며 감상자의 시선을 사선으로 이끈다.

피터 폴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려짐’, 1612~1614, 판넬 위에 유화, 420.5×320cm. 양쪽 패널 작품도 볼 수 있다.

삼면화인 이 명화는 양쪽에 또 다른 작품이 존재하는데, 왼쪽에는 예수를 잉태한 성모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대제사장이 그려져 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양쪽의 작품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 결국 네로는 양쪽에 있는 그림을 보지 못한 채 마지막을 맞이한다.

네로의 소원은 ‘십자가에서 내려짐’을 보는 것이었다. 루벤스의 이 그림이 명작인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보는 게 평생소원일 수 있을까? 요즘처럼 시각매체가 포화상태인 상황에서 죽는 그 순간 그림을 보러 간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엄마와의 추억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림을 보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일 수 있다니….

하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림 보는 것에 돈을 받았던 시절. 입장권을 끊고 미술관에 들어가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었던 시절. 그림이 제의적 가치를 지녔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플란다스의 개는 그런 시절의 미술의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서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기술복제시대 이전의 미술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사진이라는 본격적인 복제기술이 등장하기 이전의 미술은 고귀하고 성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의 사람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미술작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작품을 누가 그렸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당시 작품은 신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신성한 어떤 것이었다.

기술복제시대 이전에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어떻게 봤는지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스탕달은 1817년 이탈리아 피펜체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인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보고 심장이 뛰고, 쓰러질 것 같았다고 자신의 책 ‘나폴리와 피렌체:밀라노에서 레조까지의 여행(1817)’에 썼다. 이후 뛰어난 예술작품을 볼 때 이러한 생리적 현상이 생기는 것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그림 때문에 숨이 멈출 수도 있었던 시대의 이야기다.

플란다스의 개는 화가를 꿈꾸던 순수한 소년의 가슴 아픈 삶과 그림을 자유롭게 볼 수 없었던 시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지금과 같이 이미지 과잉시대에는 느낄 수 없는 그림의 소중함이 스며 있다. 지금도 벨기에의 앤트워프 대성당을 가면 루벤스의 명작 ‘십자가에서 내려짐’를 볼 수 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