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공동체’의 무의식

프린트

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사적’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공동체’의 무의식 혼종적 정체성이 감성으로 나타날 때…미코 벨드캄프 ㊤

기사입력2024-10-15 08:53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이 문장은 과학기술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1991년 발표한 저서의 제목이자, 그가 주장한 핵심사상을 담고 있다. 행위자-연결망 이론(ANT)으로 유명한 라투르는 근대(모던)가 추구했던 이분법적 구분 뒤에는 사실 혼종, 즉 하이브리드가 계속해서 생성되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는 실질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가시화되지 않은 혼종들이 사회의 요소들을 강하게 연결해 왔다는 것이다.

라투르의 비(非)근대인 선언은 낡아 보이는 포스트식민주의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물론 라투르가 ‘근대주의 헌법’이라 부르는 이분법적 구도는 초월적인 대상으로서 자연(비인간)과 내재적인 대상으로서 사회(인간)의 엄격한 분리에 초점이 있기에, 문화의 혼종성을 주목하는 포스트식민주의와는 다소 차이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라투르가 서로 뒤섞여 등장한 제3의 형태를 은유하기 위해 생물과학 분야의 용어인 ‘혼종’을 사용했다는 면에서 원론적 의미를 공유한다.

미코 벨드캄프, ‘Club Tropical’, 2023, 린넨 위에 오일, 아크릴릭, 122×137cm. <출처=BB&M Contemporary Art Gallery>

라투르의 비근대인 선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어떤 경계 나눔, 즉 구분이 사실은 관념에 불과하거나 심지어 망상일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구분의 베일 뒤에서 혼종들이 늘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은 단일 민족국가다”라는 주장은 사실보다는 일종의 믿음에 가까운 것이다. 혼혈과 변종, 돌연변이 과정을 거치며 유지되고 있는 게 인류이며, 우리가 말하는 ‘단일 민족’의 실상이다.

기억과 트라우마 속을 다이빙한다

타자가 나의 거울이 되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한 문화적 혼종성이나 포스트식민주의, 비근대성 등을 종종 무심히 지나치곤 한다. 그런데 타자의 모습 속에서 이를 발견하게 되면, 그 의미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남아프리카 수리남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에서 성장했으며, 현재 미국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 중인 미코 벨드캄프(Miko Veldkamp)는 혼종적 정체성을 회화로 보여주는 미술가다. 벨드캄프는 다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된 복합적 정체성을 감성적이고 경험적으로 풀어낸다. 수리남, 네덜란드, 뉴욕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그는, 자신의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기억을 결합해, 현대미술의 역사, 가족 앨범, 남국의 민속적 이미지와 자연 풍경을 자유로운 붓 터치와 물감의 흘러내림, 옅은 색조 등 감각적이고 즉흥적이며, 독특한 시각적 표현으로 재창조한다.

미코 벨드캄프, ‘Recurring Dreams’, 2023, 캔버스 위에 오일, 아크릴릭, 152.5×122cm. <출처=BB&M Contemporary Art Gallery>

그의 회화는 빛이 스민 듯한 옅고 투명한 색조와 부분적으로 불투명하게 채색된 부분, 기하학적인 패턴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흐릿함과 안정감의 미묘한 균형을 이루며 몽환적인 화면을 형성한다. 특히, 그의 회화에는 인상주의적 기법과 정신적 가치를 추구했던 나비파(Les Nabis)의 평면적 색채, 요제프 알버스(Josef Albers)가 발전시킨 투명한 색조 표현 등의 영향이 깃들어 있어서, 자연과 인공, 꿈과 현실, 내면과 외부 세계가 어우러진 풍경이 멜랑콜리하면서도 매혹적인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주로 작가 자신과 그의 가족들이며, 종종 등장하는 자전거를 탄 인물은 노스탤지어와 현실을 넘나들며 유영하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를 상징한다. 때로는 구체적으로 식별이 어려운 실루엣, 그림자, 흐릿한 형상의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의 작업에는 추억의 한 장면을 구체적으로 재현한 듯한 이미지에서부터 마치 유령처럼 초현실적인 모습까지 여러 형상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인물들은 경계적 공간에 정지해 있는데, 그 자체로 특정한 기억이자 초현실적인 존재로서 화면에 표현된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 “기억과 트라우마 속을 다이빙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회화작업이 개인적 기억과 정신적 상흔을 담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로만 한정되지 않는데, 그 기억 중에는 단순히 사적 영역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계속,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