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술 시대’에 ‘예술’을 구원하는 다른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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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초기술 시대’에 ‘예술’을 구원하는 다른 미래 기술 진보에 휩쓸린 예술을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으로 본다면

기사입력2024-12-20 08:48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한 장의 그림이 있다. 거친 선과 단순한 색채로 그려진 천사의 형상을 담고 있다. 커다란 눈을 가진 천사는 날개를 펼친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의 표정은 고요하면서도 불안하다. 이 천사가 응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지만, 날아오르지 않는다. 이 천사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존재지만, 그의 시선은 오직 뒤를 향하고 있다.

이 그림은 파울 클레(Paul Klee)가 1920년에 그린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다. 라틴어 ‘앙겔루스 노부스’로 명명된 이 그림은, 마치 역사의 한복판에서 빛과 어둠을 응시하는 목격자처럼, 단순한 존재를 넘어서 그 자체가 이야기가 되었다. 이 그림은 그려진 지 1년 뒤, 한 철학자의 소중한 소장품이 되었다. 그 철학자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그는 이 작품을 항상 곁에 두려 했다. 그는 1933년, 나치 정권이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하자 독일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할 때도 이 작품을 가져갔고,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위험을 피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탈출할 때도 이 그림을 품에 지니고 있었다. 그가 스페인 포르부(Portbou)라는 작은 마을에서 두려움 속에 과다한 양의 모르핀을 복용하여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때도, 이 그림은 그의 곁에 있었다. 당시 그는 겨우 48세였다. 벤야민이 죽은 후, ‘새로운 천사’는 그의 친구인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에게 전달되었으며, 현재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벤야민은 이 천사를 ‘역사의 천사’라고 불렀다. 그는 이 천사가 파괴된 도시, 흩어진 문명, 부서진 꿈들을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폐허가 된 과거를 바라보고 존재로 여겼다. 이 철학자는 이 그림으로 ‘역사철학 테제 9번’을 썼다.

클레의 새로운 천사,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

“파울 클레가 그린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자기가 꼼짝 않고 응시하던 어떤 것에서 멀어지는 듯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부릅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필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천사의 얼굴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우리에게 일련의 사건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바로 그곳에서 그 천사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아 올리고 또 이 잔해를 자기 발 앞에 던지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깨우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낙원에서 폭풍이 자신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천사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해 저항할 수 없이 천사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천사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런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1940, 테제9번 중에서)

‘역사철학 테제’로 더 잘 알려진 발터 벤야민의 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클레의 ‘새로운 천사’, 즉 ‘앙겔루스 노부스’가 등장한다. 바로 벤야민이 말한 ‘역사의 천사’다. 그는 이 그림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천사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못하고, 분산되어 있다. ‘입을 벌린’ 천사는 어떤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인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천사는 강력한 폭풍 때문에 날개를 접지도 못한 채 하늘까지 쌓이는 잔해의 더미를 바라보고 있다. 그곳에 머물고 싶어 하고, 잔해 더미 아래 깔린 희생자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싶어 하건만, 폭풍은 그 천사를 가차없이 과거의 반복 쪽으로, 항상 더 광대하고 파괴적인 새로운 파국으로 밀어낸다. 이 강력한 폭풍은 소위 ‘진보’라고 일컫는 것이다.

파울 클레, ‘새로운 천사’, 1920, 모노프린트, 31.8×24.2cm, 이스라엘 박물관 소장, 예루살렘.

벤야민은 역사의 천사를, 과거를 바라보며 미래로 등을 돌리고 있는 존재로 묘사한다. 천사는 파괴와 잔해로 가득 찬 과거를 응시하면서도, 끊임없이 앞으로 밀어내는 폭풍에 의해 미래로 떠밀리고 있다. ‘진보’라는 폭풍은 과거의 파편들을 더욱더 높이 쌓는다(과거의 반복). 이 비유는 진보가 미래를 향해 등을 떠밀어도 과거의 잔해 더미를, 그 아래 깔린 희생자를 어루만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벤야민은 역사의 진정한 이해와 기억을 통해, 과거의 희생자를 구원하고, 역사를 더욱 인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단순히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미래에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고통과 희생에 대한 깊은 인식과 반성을 바탕으로 미래를 새로운 감수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심오한 상징이 담겨 있다 (이 구절은 벤야민의 유명한 구절 중 하나로, 다양한 맥락에서 셀 수 없이 많이 인용되고 해석되어 왔다).

초기술 시대에 예술을 구원하는 다른 미래

지금 이 시대를 보라. 우리는 초기술 시대에 살고 있다. 기술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다. ‘챗GPT’로 활성화된 인공지능(AI)의 바람은 이제 광풍이 되어 우리의 삶 곳곳을 뒤흔들고 있다. 자율주행 자동차는 시범적으로 도시를 누비고 있으며, 새로 출시되는 자동차에는 자율주행과 유사한 기능이 탑재되고 있다. ‘애플 비전 프로’의 본격적인 판매로 인해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그리고 가상현실(VR)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뜨거워지고 있다. 게다가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비트코인은 투기의 광풍을 이끌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진보’를 향한 열망과 함께 휘몰아치는 기술의 폭풍이 우리를 미래로 떠밀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떠밀리며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

초기술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역사의 천사가 바라보는 시선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잔해 더미와 파국을 응시하는 것이 우선일지도 모른다. “죽은 자들을 깨우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초기술 시대에 우리는 오히려 기술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예술을 응시해야 하는 건 아닐까. 기술과 예술은 고대 시대에 구별 없이 ‘테크네’(techné, 희랍어 τέχνη)로 통칭되었다. 서양의 고대와 중세, 심지어는 초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기술과 예술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채 사용되었다. 예술은 기술의 쌍둥이이며, 기술의 과거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규정된 체제 속에서 희생된 먼 과거의 관념, 그 원초적 상태를 깨우고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해야 한다.

최첨단 기술 시대에 기술은 ‘진보’라는 폭풍에 떠밀려, AI와 빅데이터와 같은 첨단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예술의 형태를 선보이려 한다. 동시에, 회화나 조각 같은 매체를 ‘전통’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규정된 개념의 쳇바퀴에 넣고 과거를 반복에 갇히게 하려 한다. 그 결과, 잔해 더미만 쌓여 하늘까지 치솟게 되는 상황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진보라는 이데올로기를 멈춰라.’ 우리는 최첨단 기술이 ‘진보’의 폭풍이 되어 강하게 불어와 날개를 접을 수도 없고, 꼼짝할 수 없게 한다 해도, 그 이데올로기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역사의 천사처럼 과거를 바라보며, 잔해 더미와 그 아래 깔린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통해 다른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대 상황과 기술 발전에 매몰되기보다는,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지난 시간을 되돌아봐야 한다. 잔해 더미가 된 예술과 그 아래 깔려 희생된 것을 구원해야 한다.

우리가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으로 과거의 잔해를 자세히 관찰한다면, “죽은 자들을 깨우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술을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기술 진보의 폭풍에 휩쓸려 기술에 목덜미가 잡힌 예술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로 서 있는, 예술을 구원하는 다른 미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