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불가능한 혼돈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이 없다면

프린트

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예측 불가능한 혼돈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이 없다면 혼돈에 가담하기…냉소를 넘어 가담으로, 가담을 넘어 감시로

기사입력2025-03-18 09:16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올해 열린 슈퍼볼을 굳이 찾아보았던 건 연일 화제가 된 켄드릭 라마의 퍼포먼스 때문은 아니었다. SNS를 둘러보다 슈퍼볼 중간 광고에 동시대 미술작품이 등장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메타의 스마트 안경 광고였다. 마블 프랜차이즈 시리즈에 출연한 것으로 유명한 크리스 프랫과 크리스 헴스워스가 주연을 맡은 광고에서, 두 사람은 소장품 컬렉션을 둘러보다 악명 높은 작품을 마주한다.

“메타, 이 작품은 뭐지?” 스마트 안경에서 (인공지능이 늘 그렇게 의인화되듯)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2019)으로, 가격은 620만 달러입니다.” 헛웃음을 짓는 크리스 프랫의 곁으로 헴스워스가 바나나를 질겅거리며 나타난다. “그거 620만 달러짜리 바나나야!” 소동이 시작된다.

2019년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아트 바젤 마이애미 비치에서 공개한 ‘코미디언’은 뻔한 만큼 정확하게 제 역할을 했다. 아트페어 가벽에 덕트 테이프로 붙인 바나나를 수만 달러에 팔아 치우며 화제를 모은 것이다(2019년 12만 달러에 거래되었던 ‘코미디언’은 경매를 거치며 수백만 달러까지 가격이 올랐다). 아트페어 현장에서 진행된, 바나나를 먹어 치우는 퍼포먼스는 화제를 한 층 증폭시켰다. ‘코미디언’을 출품한 갤러리 페로탕은 그것이 바나나의 형태와 각도, 배치에 이르기까지 요소요소를 섬세하게 고려한 ‘작품’이었다고 부연했고, 마우리치오 카텔란 역시 인터뷰를 통해 “그건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진지한 논평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메타의 광고에 적절히 녹아든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코미디언’은 ‘동시대 미술은 사기’라는 대중적 냉소 위에서 적당히 줄을 타며 화제성과 시장가치를 입증한 마케팅 캠페인에 가까워 보였다.

미술과 시장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는 짝이라는 건 비밀이 아니다. 미술은 화폐화되지 않는다는 신화에 기대어 아우라를 얻고, 시장은 그러한 아우라조차 경제화해 자본에 되먹인다.

‘더비 매치:감시자와 스파이’, 기획 권혁규, 사진제공 뮤지엄헤드, 촬영 조준용(CJY ART Studio).

문제는 미술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적대의 수단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과 금융화를 연구하는 맥스 헤이븐(Max Haiven)은 오늘날 시장에 맞서 온 미술의 전략이 점차 진부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앤디 워홀부터 데미안 허스트까지, 쿨하고 아이러니한 자세로 시장과 돈의 영향력을 인정한 포스트-순수 작가주의적(post-innocent auteurism) 태도는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이라는 거짓 신화를 냉소적으로 폭로하면서 의외성을 자아냈다. 하지만 이들의 후계자가 끝없이 샘솟은 탓에, 쿨한 태도를 취하는 냉소의 전략은 빛이 바래고 말았다. 이제 미술이 일종의 비즈니스임을 인정하는 예술가의 냉소와 동시대 미술은 사기라고 비아냥대는 대중의 냉소는 구분되지 않는다. 싸움의 도구가 아직 남아 있을까?

2023년 종로구에 위치한 공간 뮤지엄헤드에서 열린 ‘더비 매치:감시자와 스파이’(2023, 이하 ‘더비 매치’)는 냉소와 폭로를 넘어 시장을 상대하기 위한 미술의 전략을 고민하고 있었다. “분명히 말하면 시장의 바깥은 없다”고 운을 뗀 ‘더비 매치’는 당시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이 개최되는 시기와 맞물려 열렸다. 프리즈 개최를 전후해 서울에서는 ‘아트위크’라는 이름으로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즐거운 행사를 기대하고 공간을 찾은 관객에게 시장과 미술의 관계를 비평적으로 숙고해보자며 골치 아픈 숙제를 끼얹기 위한 계획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제목인 ‘더비 매치’는 같은 지역을 연고지로 갖는 두 팀의 경기를 뜻한다. 시장을 바라보는 미술의 시선은 이분법적일 때가 있다. 시장에 완전히 동조하거나, 혹은 완전히 탈출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다. 그러나 완전한 동조도, 완전한 탈출도, 역사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미술, 그리고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과 거리가 멀다. ‘더비 매치’는 시장을 멀리하는 대신 거기에 가담하기로 한다. 아트위크 동안 문을 걸어 잠그기보다는 오히려 문을 열고 프리즈 서울에 담기지 않은 작품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시장과 미술의 대립은 언제나 생각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났다. 전시 서문에 쓰인 것과 같이, 미술은 시장을 “조롱하고 동경하고 무시하고 집착한다.” 이것은 냉소의 태도로 일관할 때 보이지 않는 굴곡이다. ‘더비 매치’는 냉소를 넘어 가담으로, 가담을 넘어 감시와 염탐으로 전략을 확장한다. 빛바랜 냉소로부터 한 발짝 더 나아간다.

프리즈 서울은 올해도 열릴 것이며, ‘더비 매치’가 보인 문제의식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고, 시장은 보다 극단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전자화된 금융시스템은 초단타 매매(high-frequency trading, HFT)와 같은 알고리즘 거래를 활용하는데, 이처럼 변칙적인 금융 테크놀로지는 시장에 극적인 변동성을 창출할 수 있다. 알고리즘은 밀, 석유, 구리 등의 필수 원자재 시장에 개입해 과격한 변동성을 만들고 이에 실물경제 또한 흔들린다. 하루하루 연쇄적 금융위기로 이어질지 모를 러시안룰렛이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자본의 축적이 급속도로 가속하고, 미술이 비판하던 시장이 점점 골동품이 되어갈 때, 시장이라는 혼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예측 불가능한 혼돈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이 없다면 혼돈의 가장 깊은 곳으로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가담하기’는 어쩌면 더욱 긴요한 전략이 될지도 모르겠다. 시장이 가담을 이렇게나 강압적으로 요구하고 있기에.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