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지속적인 퍼포먼스…감정의 변화와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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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반복·지속적인 퍼포먼스…감정의 변화와 성찰 슬픔의 반복…라그나 캬르탄손(Ragnar Kjartansson)

기사입력2025-02-21 13:32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두 남녀가 마주한 방 안, 배우 구드룬 아스문드스도티르(Guðrún Ásmundsdóttir)는 떨리는 손으로 총을 겨누고 있다. 긴장감은 숨 막히는 정적 속에 응축되고, 마침내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총성과 함께 시간이 멈춘 듯한 충격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배관공역의 스테이퓌르 올리프손(Steinn Ármann Magnússon)은 치명적인 고통 속에서 쓰러진다. 1977년 상영된 아이슬란드 영화 ‘살인의 이야기’(아이슬란드 제목:Morðsaga)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은 단순히 영화적 서사로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두 배우가 실제 부부였다는 사실은 이 장면을 흥미롭게 만든다. 게다가 이 영화를 촬영할 당시 여배우의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다. 영화라는 가상에서 여배우가 남배우를 총으로 쏴서 죽이는 상황, 영화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두 배우가 실제 부부라는 사실, 그리고 여배우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 장면은 임신한 아내가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이는 치정극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이 부부는 잘 지냈고, 여성의 뱃속에 있던 아이는 잘 태어나 멋지게 성장했다. 그 아이는 부모가 출연한 그 영화를 배경으로, 여러 명의 음악가와 라이브로 연주하는 퍼포먼스 ‘식기 세척기 옆으로 데려다 주세요:결혼 기념’(Take Me Here by the Dishwasher:Memorial for a Marriage, 2011·2014)을 보여주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가 바로 라그나 캬르탄손(Ragnar Kjartansson)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

라그나 캬르탄손, ‘식기 세척기 옆으로 데려다 주세요:결혼 기념’, 2011·2014, performance and film installation. <사진=Benoit Pailley, 출처=New Museum, New York>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의 뉴뮤지엄, 런던의 바비칸 센터, 워싱턴 D.C의 허시혼 미술관 등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한 라그나 캬르탄손은, 이렇게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에서 활동하기를 고집한다. 그 까닭은 자신의 조국 아이슬란드를 사랑하고 그곳에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여전히 숲에 요정(elf)이 산다고 믿는데, 캬르탄손은 자신의 영감과 세계를 누비며 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요정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레이캬비크 시립극장에서 감독이자 배우로 활동한 아버지와 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할아버지는 도예가로, 스위스 플럭서스 작가 디터 로스(Dieter Roth)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이러한 상황도 그는 감사하게 여긴다. 어린 캬르탄손에게 무대 뒤는 놀이터였고, 그에게 예술은 일상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는 퍼포먼스 아티스트와 무대 예술가를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가족적 배경은 그의 예술적 주제와 형식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앞서 언급한 퍼포먼스 ‘식기 세척기 옆으로 데려다 주세요:결혼 기념’은 부모가 함께 출연한 영화 ‘살인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작업이다. 이 퍼포먼스는 영화 속 결혼의 복잡한 장면을 반복적으로 상영하며, 이를 배경으로 기타 연주와 음악적 퍼포먼스를 결합해 감각적인 몰입을 제공한다. 특히, 이 작품은 사랑과 갈등이라는 대조적 감정을 하나의 퍼포먼스 안에 담아 관객에게 강렬한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속 장면을 바탕으로 한 이 작업은 그의 가족적 서사를 현대미술의 언어로 승화시킨 작업으로,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 정서로 확장하는 그의 예술적 표현방식이 잘 드러난다.

라그나 캬르탄손, ‘God’, 2007, single-channel video with sound, pink curtains, 30분. <사진=Rafael Pinho, 출처=https://i8.is>

가족 서사를 예술적 탐구로 확장한 대표적인 작업은 ‘나와 나의 어머니’(Me and My Mother)다. 2000년에 시작된 이 작업은 그의 어머니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 장면을 5년마다 반복적으로 촬영한 영상작업이다. 어머니가 아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는 사실 다소 충격적이고 도발적이다. 하지만 이 행위는 모자 관계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은유적 장치로 작용한다. 그의 어머니는 연기자로서의 자신과 실제 어머니로서의 자신을 이 퍼포먼스 안에서 결합하며, 깊은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행하는 행위를 통해 아들과의 관계를 드러낸다. 5년 주기로 촬영하다 보니 시간이 흐르며 두 사람의 외모와 태도는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이 반복적 행위는 변하는 감정과 가족 관계의 변하지 않는 본질의 역학을 기록한다.

그의 가족 서사는 단순히 개인적인 기록이라고 볼 수 없다. 그의 작품은 가족 관계의 고유한 복잡성을 통해 관객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며, 인간관계의 보편적 본질을 재고하게 이끈다. 이러한 작업은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복과 슬픔에 예술을 담다

라그나 캬르탄손의 작업 형식은 반복과 지속이 주요하게 나타나며, 내용상으로는 슬픔이 작업의 전반을 지배한다. 그의 작업에서 반복은 단순한 반복을 넘어, 시간을 경험하게 하고 감정의 변화를 느끼게 만드는 예술적 장치로 작동한다.

라그나 캬르탄손, ‘E단조의 여성’, 공연 설치. <사진=Jules van Iperen ©Pix4Profs, Jules van Iperen, 출처=https://depont.nl>

이러한 특성이 잘 드러나는 작업은 ‘많은 슬픔’(A Lot of Sorrow, 2013)이다. 슬픔을 토해내는 듯한 이 작업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PS1에서 미국의 인디 밴드 ‘더 내셔널’(The National)이 ‘슬픔’(Sorrow)이라는 노래만을 6시간 동안 반복 연주한 공연이다. 관객은 처음에 감정적으로 몰입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반복의 지루함이 감각을 둔화시키고, 다시 반복의 끝에 다다르면 관객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이 작업은 반복의 심리적 효과를 탐구하며, 관객이 반복 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이 작업에서 지속적 반복은 단순히 형식적 실험이 아니라, 반복이 감정과 시간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는 철학적 도구로 작용한다.

반복과 슬픔이 몽환적이고 매혹적으로 나타나는 작업으로는 ‘God’(2007)를 들 수 있다. 자주색 벨벳 배경을 갖춘 무대에 말끔히 빗어 넘긴 머리를 하고 정장을 차려입은 1950년대 젊은 라운지 가수가 간소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배경으로 “슬픔은 행복을 정복한다”라고 나지막하게 반복하는 노래는 슬프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캬르탄손이 사랑하는 음계는 E단조다. 그는 E단조를 처음 듣고는 그때 비로소 ‘음악’을 느끼게 되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그에게 E단조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선율이며, ‘궁극적인 슬픔’의 표현이다. 이러한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업이 퍼포먼스 ‘E단조의 여성’(Woman in E, 2016)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퍼포먼스에서 등장하는 여인은 돌아가는 금색 원형의 무대에서 반짝이는 금색 가운을 입고 온종일 기타를 연주하면서 E단조의 노래를 부른다. 전시기간 그녀는 쉬지 않고 걱정과 근심, 생각에 잠긴 상상병에 걸린 모습으로 노래한다. 하루 종일 낮게 깔리는 슬픈 단조의 노래는 우리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슬픔에 벅차오르게 한다. 어쩌면 그는 슬픔이 삶에 일부임을 느끼게 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라그나 캬르탄손의 작업은 현대미술이 어떻게 시간, 감정, 관계를 새롭게 탐구하는지 보여준다.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퍼포먼스는 관객이 감정의 변화를 경험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통찰을 얻게 한다. 그의 가족적 서사가 담긴 작업은 예술이 개인적 경험과 보편적 메시지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의 예술은 슬픔, 사랑, 반복 그리고 시간이라는 주제를 통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