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기계 협업으로 창조될 수 있는 새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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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예술 ㅣ 예술경영 인간과 기계 협업으로 창조될 수 있는 새 지평 데이터, AI, 인간이 엮이다…데이터가 꾸는 꿈 ‘레픽 아나돌’

기사입력2025-07-12 00:00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예술은 다른 예술을 낳고, 그렇게 탄생한 예술은 또 다른 예술을 불러온다. 여기, 8살 때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를 본 소년이 있다. ‘블레이드 러너’는 필립 K.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리들리 스콧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으로, SF 영화에서 역사적인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영화는 소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영화 속 인조인간 레플리컨트(replicant)가 자신이 지닌 기억이 이식된 것임을 깨닫는 장면에서, 이 소년은 평생을 관통할 하나의 질문을 갖게 된다. “기계는 타인의 기억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스탄불의 골목에서 태어난 이 소년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로스앤젤레스의 스튜디오에서 기계의 꿈을 빚어내는 예술가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답을 ‘창조해 내고’ 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바로 레픽 아나돌(Refik Anadol)이다. 아나돌은 “데이터를 물감으로, 기계를 붓으로” 사용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려내는 예술가다.

레픽 아나돌, ‘비지도’, 2022, AI Data Sculpture. <출처=www.dandad.org>

◇데이터를 물감으로, 알고리즘을 붓으로=레픽 아나돌의 작업실에서는 매일 밤 기계들이 꿈꾼다. 3억 개의 자연 이미지를 학습한 AI는 인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을 그려내고, 200년에 걸쳐 축적된 미술관의 기억은 환각적인 영상으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데이터를 “마르지 않는 물감”에 비유하는 그는, 데이터 시각화, 기계학습, 생성형 AI 등 첨단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를 통해 기존 미디어 아트의 한계를 넘어 ‘데이터 조각(data sculpture)’, ‘데이터 페인팅(data painting)’ 같은 새로운 예술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2008년 ‘데이터 페인팅’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아나돌은, 예술 창작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그는 데이터를 단순히 정적인 숫자나 코드의 집합이 아닌, 유기체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개체로 본다. 그의 작업 과정에서 데이터는 어떤 것에 대한 기억의 형태이며, 어떤 모양이나 형식으로든 변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재료다. 데이터들 사이를 오가며 만들어진 ‘합성된 꿈(synthetic dreams)’의 세계에서 우리는 익숙한 물질성, 첨단기술, 무한한 자연 세계가 만나 새로운 형태와 색채, 질감으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또한, 그의 기술 활용방식은 전통적인 예술가와 도구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정의를 요구한다.

그의 작업에서 AI는 단순한 보조 수단이나 인간의 명령을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AI에 세부적인 수행 명령을 내리는 대신, AI를 학습시켜 스스로 새로운 결과물을 생성해 내도록 한다. 이는 AI가 예술가의 손뿐 아니라 “머리(사고)까지도 일정 부분 대신할 수 있다”라는 급진적인 사고로 이어진다. 데이터 기반 기계 학습 알고리즘을 사용해 기억을 디지털화하고, 추상적이고 다채로운 환경 예술을 창조하는 그의 작업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창의성 탐구라고 할 수 있다.

레픽 아나돌, ‘기계 환각:자연의 꿈’, 2021, AI Data Sculpture, 가변크기.<출처=fadmagazine.com>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기계 환각:자연의 꿈(Machine Hallucinations:Nature Dreams)’(2021)은 데이터 미학이 절정에 이른 모습을 보여준다. 아나돌은 이 작품을 위해 2년간 5억 개 이상의 식물, 동물, 풍경 등의 자연 이미지를 비롯해 아마존 새소리와 같은 50만 개 이상의 방대한 사운드를 수집했다. 그 후 1년간의 데이터 정제와 AI 학습 과정을 거쳐 이 작품은 탄생했다.

이 작품은 인간에 의해 시작됐지만 AI가 학습하고 창조적으로 완성한 독특한 창작물이다. 그는 구글 AI 퀀텀 팀과 협력하며 퀀텀 컴퓨팅 연구 프로젝트에 접근할 수 있었고, AI가 유도한 잠재 공간과 퀀텀 하이퍼스페이스를 결합해 ‘자연 미학의 렌즈를 통한 대안적 현실’을 불러온 것이다. AI는 여기서 기존 자연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 상상력으로만 가능한 초현실적 자연을 창조해 냈다.

또 다른 대표작인 ‘비지도(Unsupervised)’(2022)는 MoMA(뉴욕현대미술관)가 영구 소장한 작품으로, 이 작품을 통해 아나돌의 AI 예술철학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위해 200년에 걸친 MoMA 소장품의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한 AI는, 인간의 개입 없이 데이터를 분석하고 시각화하면서 마치 기계가 꿈꾸는 듯한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생성해 낸다. ‘Unsupervised’라는 작품 제목은 비지도 학습(Unsupervised Learning)의 철학을 반영하고 있으며, AI가 스스로 패턴을 찾아내는 작업 방식을 명확히 드러낸다.

생성형 AI가 실시간으로 구현하는 예측 불가능한 환각과 환상의 시각 이미지는 관람객마다 다른 해석을 유도할 뿐 아니라, 기존의 전시 문법과 감상 방식에 변화를 요구한다.

◇미술관을 넘어서…새로운 가능성 열리나=아나돌이 추구하는 것은 ‘몰입’이다. 그는 전통적인 미술관의 벽면을 넘어, 대형 스크린과 건축물 외벽, 공공장소를 포함한 다양한 실내외 공간으로 전시를 확장한다. 이러한 시도는 관객을 작품 내부로 끌어들여, 단순한 관람자를 작품의 적극적인 참여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2015년 이스탄불 조를루 공연예술센터에서 선보인 ‘무한의 방(Infinity Room)’은 이러한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네 개의 벽면에 투사되는 생성적 패턴들이 “우주적 관문이나 초월적 포털”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수많은 데이터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무한한 공간감을 창조함으로써, 관객이 마치 현실을 벗어나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공간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레픽 아나돌, ‘살아 있는 건축:카사 바트요’, 2022, AV Performance. <출처=refikanadol.com>

역사적 건축물을 캔버스로 활용한 작업도 있다. 가우디의 역사적인 건축물 카사 바트요(Casa Batlló)의 외벽을 디지털 캔버스로 삼아, 화려한 프로젝션 맵핑으로 구현한 ‘살아 있는 건축:카사 바트요(Living Architecture: Casa Batlló)’(2022)다. 아나돌은 이 작업을 위해 바르셀로나의 실시간 기후 데이터를 수집하고, 카사 바트요 팀과 함께 아카이브 연구를 진행했다. 바르셀로나 중심가에서 6만5000명 이상이 관람한 이 작품은, 1926년 사망한 안토니오 가우디의 유기적 건축 철학과 아나돌의 데이터 미학이 만나 정적인 건축물을 살아 숨 쉬는 디지털 생명체로 변모시켰다.

아나돌은 끊임없이 창조하고 변화하는 데이터와 기술 속에서 인간의 기억과 감정, 자연의 경이로운 순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그가 제시하는 ‘생성 현실’은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그의 작품에서 AI는 능동적 주체로서 환상적인 이미지를 창출한다. 그렇다고 해서 AI가 인간 예술가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인간 예술가는 AI에 어떤 정보를 학습시킬지를 결정하고, 결과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또 어떤 맥락에서 해석될 것인지를 예측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작업을 기획하고 감독하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다.